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색 작전 (문단 편집) === 독일 동부전선군의 상황 === 히틀러의 구상안은 암호명 청색(Blau) 작전으로 구체화되었다. 동쪽으로는 [[스탈린그라드]]까지 전진시키고 남쪽으로는 캅카스 지방을 좌우로 관통하는 캅카스 산맥의 고산 통과로까지 나아가 카스피 해의 [[아스트라한]]과 [[그로즈니]]까지 나아가 캅카스 지역을 완전히 장악, 소련내륙과의 연결을 끊어놓는 것이 핵심이었다. 공세에는 6군, 17군, 4기갑군, 1기갑군이 참가할 예정이었으며, 헝가리군과 루마니아 군도 참가가 예정되었다. 공군은 6월 20일에는 5월에 비해 20% 증강된 2644기가 배치되었으며 4항공군이 배치되었다. 이 와중에 1942년 초에 남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페도어 폰 보크에게 지휘권이 넘어갔다. 라이헤나우는 독일 육군 내에서 열렬한 친나치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히틀러도 정권 장악 초기부터 군부의 협조를 얻는데 라이헤나우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그의 의견을 무조건 거부만 할 수는 없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야전군 지휘관으로서도 재능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작전안은 3개의 공세로 구성되었다. 1. [[헤르만 호트]]의 지휘를 받는 제4기갑군과 2군이 헝가리군의 지원과 함께 쿠르스크와 보로네시로 진격하고, 그대로 볼가강까지 다다른다. 2.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6군은 하르키프로 진격한 뒤 4기갑군과 보조를 맞춰 평행하게 진군하여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한다. 3. 17군과 1기갑군은 돈강하류로 공격하며 루마니아 군이 합세한다. 히틀러는 원래 이 작전명을 게르만족의 전설적인 영웅의 이름을 따서 처음에 "지크프리트 작전"이라고 명명했으나, 회심의 한방으로 소련을 멸망시키겠다던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상기했음인지, 전통적으로 색깔을 이름으로 붙이던 과거로 돌아가서 [* 예를 들어 [[폴란드 침공]]은 "백색 상황 - Fall Weiß", [[프랑스 침공]]은 "황색 상황 - Fall Gelb"] "청색 상황 - Fall Blau"으로 명명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지나치게 목표가 거대한 것이었으며, 안그래도 바르바로사 작전-모스크바 전투로 인한 엄청난 손실로 병력부족에 시달리는 독일군에게는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은 이 공세에 엄청난 수의 추축동맹국 병력을 포함시켰다. 이들은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헝가리 왕국]], 그리고 [[크로아티아 독립국]](의용병)군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무장수준이나 훈련도는 매우 불충분한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은 이들을 2선에 배치하고, 후방에 있던 독일군을 일선에 세운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독일군이 너무 대담한 작전을 세우는 바람에, 독일 동맹국 병력이 맡고 있는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측면이 소련군에 직접 노출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런 문제점은 후에 [[스탈린그라드 전투|독일군이 참패]]하는 원인이 된다. 1942년 6월, 독일군의 정보장교가 탄 비행기가 소련군 지역에 불시착했다 포로가 되었고, 독일군의 이와 같은 작전안은 소련군에게 모조리 넘어갔으나 히틀러는 이에 책임있는 지휘관인 슈툼메(Stumme) 중장만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슈툼메는 5년형을 받았으나, 남방집단군 사령관 보크가 힘을 써서 아프리카 군단으로 전속되고 롬멜 휘하에서 싸우다, 하필 엘 알라메인 2차 전투가 진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롬멜이 자리를 비운 사이 실질적인 사령관으로 있던 시점에서 심장마비로 죽어버려서, 전투 패배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 작전안은 그대로 실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